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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한국외교 ‘백 투 더 퓨처’ 가능할까

[강성학 칼럼] 한국외교 ‘백 투 더 퓨처’ 가능할까

기사승인 2020. 02. 0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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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은 1948년 건국과 함께 수립되고 유지되던 대한민국의 근대적 외교정책의 궤도에서 일탈, 유교적인 전근대적 국제질서의 세계관인 낡은 궤도로 진입하여 멈출 줄 모르는 설국열차처럼 질주하고 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정성으로 섬겨야’ 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도덕률에 따라 형제국 간에는 매사 ‘형님 먼저’다. 여기엔 국가의 신성한 주권의 사상이나 국가 간 국제법적 평등의 개념이 없다. 철저히 수직적이고 계층적인 상하 간 질서가 있을 뿐이다. 이런 유교적 세계관이 현재 중국 대외정책의 본질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21세기 중국식 제국주의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문재인 정권의 외교는 결국 중국을 무조건 떠받들고, 또 자신을 ‘남쪽 대통령’이라고 자칭하면서 북한이 형님인 양 어린 김정은 수령에게 매사 굴종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대한민국의 안위와 번영을 위협하는 외교정책의 잘못된 궤도 위를 질주하고 있다. 이런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폐기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낡고 폐기된 유교적 외교정책의 원칙들이 한국의 문재인정권에 의해 부활되어 마치 새로운 지상명령처럼 실천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의 수립이후 줄곧 냉엄한 국제정치의 원리에 근거하여 국가의 주권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고 동북아의 강대국 간 힘의 균형 속에서 한미동맹을 통해서 국가의 안전과 번영과 남북통일을 추구해온 대한민국의 외교적 전통을 현 정권은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국제적 현상타파를 추구하는 중국의 유교적 외교정책에 편승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궁극적으로 현상타파적인 유라시아 대륙의 중국제국에 편승하여 전통적 우방인 미국 및 일본의 해양국들을 오히려 견제하는 새로운 역할을 자처하는 꼴이다. 따라서 이 나라의 미래가 참으로 안타깝고 염려스럽기 그지없는 재앙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 재앙이란 만일 대한민국이 중국제국의 영향권하에 들어가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1975년의 무력에 의한 베트남식 통일 방식이 아닌 총 한방 쏘지 못하고 남한 종북 정부가 김정은을 불러들이는 방식, 즉 1938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 방식으로 한반도는 일시에 공산화될 것이다. 당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나치당원들과 수많은 협력자들에 의해서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오스트리아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독일군은 그렇게 비엔나 거리를 행진했고 오스트리아국가는 나치제국의 한 지방으로 전락해버렸다. 히틀러 치하의 오스트리아인들은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피와 땀과 생명을 바치는 참담한 비극적 역사를 남겼을 뿐이다. 이를 융통성 있게 동북아에 적용한다면 어쩌면 이 비극적 오스트리아인들처럼 공산화된 한국인들은 미-중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의 방어를 위한 최전방 전초기지로서 적국이 된 미-일동맹 체제의 1차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비극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럴 경우 한국은 미국공격의 아침거리도 안 될 것이다. 이런 국가적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한국 외교정책의 신속한 궤도수정을 통해 ‘백 투 더 퓨처’를 이루어야만 한다. 유명한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던 ‘백 투 더 퓨처’란 말은 역사의 진행이 어떤 뜻밖의 사고로 궤도를 이탈하여 엉뚱하게 잘못 진행됐을 때 이로부터 탈출하여, 원래 진행되었을 바로 그 역사의 궤도로 재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인들은 첫째로,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주의를 진작시켜야 한다. 여기서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와 구별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17세기 중엽 근대의 영토국가가 탄생한 이래 애국주의, 혹은 애국심은 국가의 영토 보존 유지를 의미했으며 19세기에 와서는 민족주의와 동일시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수립된 국가와 국민들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아예 동일시해버렸다. 그러나 애국주의란 원래, 즉 그리스-로마 시대엔 주민들의 삶의 방식, 즉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반영하는 헌정질서를 방어하고 유지한다는 의미로 탄생했으며 단순히 거주하는 땅과는 거의 무관했었다.

그러나 최근사(最近史)에서 애국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하자 아주 저돌적이 되었다. 조지 오웰은 일찍이 애국주의란 원래 군사적 및 문화적으로 방어적인 반면에 민족주의란 자기가 개인적으로 침잠하고 있는 민족의 권력과 위신을 위한 집단적 욕망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에 공세적이라고 설파했었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대한 올바른 역사의식과 함께 자유민주주의적 삶의 방식을 규정한 헌법질서를 사랑하고 유지하려는 국민적 애국정신이 충만한 역사의 궤도로 재진입해야 한다.

둘째로, 조국통일은 한국인에게도 하나의 지상명령이다. 북한 동포는 김일성 전제군주의 제2대 계승자인 김정은의 폭정 아래 노예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그 증인이다. 노예란 쇠사슬에 꽁꽁 묶여 짐승처럼 강제노역을 당하는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패전하여 적국의 점령하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경우와 전제군주적 폭군하에서 사실상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숨죽이고 연명하는 주민들을 노예상태라고 간주해왔다. 헤겔식으로 말해 오로지 전제군주인 김정은 한 사람만 자유롭고 주민 모두가 사실상 노예인 북한의 전제적 폭정으로부터 북한동포를 해방시켜야 할 도덕적 의무를 우리 모두가 지고 있다. 따라서 남한 정부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으려고 언제나 남한의 대통령을 아직도 ‘남조선 당국자’로만 부르는 북한과의 실존적 투쟁에서 대북정책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 속에서 북한 동포들도 살 수 있도록 해줄 노예상태인 ‘북한동포의 해방’으로 복귀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한국은 전쟁에 대비해 제대로 무장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핵무장의 준비를 포함하여 최첨단 군사력 구비에 국가정책의 최우선적 순위를 두어야 한다. 강력한 군사력은 전장에서뿐만 아니라 외교의 현장에서도 긴요하다. 프레드릭 대왕이 일찍이 간파했던 것처럼 무력 없는 외교는 악기 없는 음악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가 동일한 수준의 군사력을 보유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나라의 총체적 역량에 의해서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접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가들은 언제나 자국의 제한된 군사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믿을 만한 동맹국가를 찾았다. 한국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국제정치적 조건에서 요구되는 충분한 군사력을 자력으로 확보할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북한의 침공 이후 지난 70여 년간 우리에게 동맹국으로서 역할을 다해준 미국과의 관계에서 최근 잃어버린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는 한국도 미국에게 가치 있고 믿을 만한 동맹국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해야만 우리 대한민국은 빗나간 역사의 궤도에서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빛나는 역사를 이어갈 올바른 궤도로 ‘백 투 더 퓨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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