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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정의 씨어터토크]도끼와 하드록으로 펼치는, 그녀들의 카니발 ‘리지’

[현수정의 씨어터토크]도끼와 하드록으로 펼치는, 그녀들의 카니발 ‘리지’

기사승인 2020. 06. 07.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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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연대 조명한 록 뮤지컬...완성도 높은 음악 무대 가득 채워
뮤지컬 리지_공연사진_제공 쇼노트 (1)
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제공=쇼노트
록 뮤지컬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1960년대 미국에서였다. 모든 넘버들이 록으로 구성된 첫 번째 뮤지컬인 ‘헤어’는 기성 사회의 부조리에 반대하는 시니컬한 장면들로 이어졌는데, 줄거리 중심은 아니었다. 관련해 당시 록과 뮤지컬의 궁합을 좋게 보지 않는 견해들도 있었다. 강한 비트에 드라마의 흐름을 섬세하게 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같은 우려가 무색하게도 지금까지 록 뮤지컬은 나름의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마음껏 강렬함을 발산하며 컬트적 묘미를 느끼게 하거나 부드럽게 절충해 이야기를 잘 전개하면서.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팝 록’으로 유연하게 드라마를 이끈 ‘렌트’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대학로 드림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리지’는 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대사가 거의 없는 가운데 록으로 점철된 넘버들과 배우들의 폭발적인 퍼포먼스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여성 인물들만 출연하는 흔치 않은 록 뮤지컬이기도 하다. 그런데 네 명의 여성은 왜 무대에서 그리도 분노어린 목소리를 외치는가. 극의 내적 개연성만으로는 그 이유가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극장 밖의 동시대적 이슈와 감수성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작품의 소재인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128년 전부터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사회구조적 ‘억압’을 담고 있다. 미국에서 ‘리지 보든 사건’은 이야기 자체로 새로운 정서적 효과를 이끌어내기에는 이미 너무 유명하고, 소설·영화·오페라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에서 다뤄져 왔다. 2018년에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출연한 크레이그 맥닐 감독의 영화가 건조하면서도 디테일한 심리 묘사로 적잖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즉, 리지는 문화적으로 이미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소재가 된 것은 1892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서 리지라는 30대 여성이 의붓어머니와 친아버지를 도끼로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사건이다. 이는 물증이 확실치 않은데다 명망 있는 가문의 여성인 리지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풀려나면서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당시에도 여러 추측이 난무했던 만큼 작품들이 보여주는 살해 동기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뮤지컬에서는 둘째 딸 리지와 첫째 딸 엠마가 아버지에게 성적인 학대를 당해온 것으로 묘사된다. 뿐만 아니라 리지는 이웃집에 사는 동성 친구 엘리스와 사랑을 나누며 아버지를 거역하는데, 이에 대해 폭력적으로 저지당한다. 아버지가 리지의 비둘기들을 도끼로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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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제공=쇼노트
뮤지컬 ‘리지’는 1990년부터 넘버 4개로 구성된 실험적인 뮤지컬로 개발되기 시작해 2009년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고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관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 만큼 인물들의 관계나 극의 진행이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는 있다. 록 뮤지컬에서 중요한 것은 록의 정신 혹은 정서를 얼마나 살렸는가 하는 점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의 연대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적 학대를 일삼는 자에게 도끼를 든다는 점에서 기성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동시대성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물들의 관계성, 특히 리지와 앨리스의 갈등과 해결 등이 좀더 명확하게 그려지면 더욱 호소력을 지닐 것 같다.

무대를 가득 채워주는 건 무엇보다 완성도 높은 음악이다. 하드록에 블루스, 펑크, 랩, 메탈 등 다양한 스타일이 섞여든다. 배우들의 목소리뿐 아니라 라이브 밴드의 사운드 역시 강렬하면서도 정교하다. 무대는 이러한 음악과 잘 어우러지는데, 감옥을 연상시키는 2층의 철창 구조물과 이를 몽환적으로 비추는 조명과 영상은 카니발적인 환상을 극대화한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여성들은 고전적인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펑키한’ 패션의 의상과 머리스타일로 변신한 채 합창한다. “리지 보든 도끼를 들어…41번 내리쳤다네”라고.

스티븐 체슬릭 드마이어와 알랜 스티븐스가 공동 작곡을, 스티븐 체슬릭 드마이어와 팀 매너가 공동 작사를, 그리고 팀 매너가 극작을 했다. 국내 연출은 김태형이 맡았다. 나하나, 홍서영, 제이민, 이영미는 강한 개성을 표출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었으며, 모두 놀라운 기량을 과시했다. 공연은 21일까지.

/현수정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현수정 공연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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