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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쓸모 있는 바보들’

[칼럼] ‘쓸모 있는 바보들’

기사승인 2020. 01.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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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숙명여대 석좌교수. 변호사
새해의 첫 노래는 언제나 희망의 찬가였다. 그러나 2020년 정초에는 희망의 속삭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안과 우려의 수군거림이 새어 나왔다. 민초들의 살림살이는 지난해보다 좀 나아질 것인가, 혹은 더 어려워질 것인가? 태극기와 촛불로 찢어진 광장은 이해와 화합의 한마당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증오와 분노의 불길로 더 거세게 타오를 것인가? 나라는 자유와 민주의 헌정질서를 온전히 유지할 것인가, 오히려 독선과 통제의 어두운 그늘로 뒤덮일 것인가?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법치는 권력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으로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자유의 보장이 법의 존재 이유다. 특정 세력이 입법·사법·행정의 국가권력을 통째로 장악한 전체주의적 상황에서는 국민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한다. 자유혼은 전체주의를 거부한다. 전체주의는 진실을 감추고 거짓으로 대중을 선동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진실의 영토에만 존재한다. 위선과 거짓의 토양에서는 자유가 꽃필 수 없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의 선언이다. 진리의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망각·은폐를 뜻하는 ‘레테’에 부정의 접두어 ‘아’가 붙은 단어다. 진리는 망각·은폐를 부정한다. 잊히거나 은폐된 진실을 드러낸다. 그 진실이 자유의 바탕이다. 성인(聖人)이 가르친 영혼의 자유를 속세의 정치 현실에 대입하는 것은 범주오류가 될 수 있겠지만 ‘진실과 자유의 본질적 상관관계’는 성속(聖俗)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진실 없이 자유 없다.

“마르크시즘은 협력할 동반자를 찾는 대신에 공격할 적을 찾는다.” 칼 포퍼의 진단이다. 마르크시즘뿐 아니라 모든 전체주의의 특징이 반대 세력을 민중의 적으로 몰아 분노와 증오의 표적으로 삼는 것이다. 권위주의 독재보다 더 위험한 것이 근본주의 이념의 독선이다. 특정 이념에 중독된 정권은 자신을 선으로, 반대 세력을 악으로 규정한다. 반대자는 궤멸해야 할 적폐일 뿐, 결코 협력의 동반자가 아니다.

아리안우월주의의 우상 히틀러는 유대인을 악으로, 중국공산주의의 우상 마오쩌둥은 자본가를 적으로 몰아붙였고, 그 선동에 놀아난 나치와 홍위병은 끔찍한 만행으로 우상의 적들을 공격했다. 이처럼 독재자의 선동에 맹목적으로 휘둘리는 군중을 레닌은 ‘쓸모 있는 바보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바보들은 권력의 우상에겐 쓸모가 있어도 민주주의에는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 500명의 배심원이 건네준 독배로 숨을 거뒀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작가 카잔차키스가 스스로 쓴 제 묘비명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희망을 버린 체념의 넋두리가 아닐 것이다. 운명이나 제도나 관습에 기대함이 없이 자신의 삶의 길을 스스로 열어가는 실존의 자유를 뜻하는 것일 게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힘도 존재의 근원적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는 믿음의 고백일 터이다. 카잔차키스의 실존적 자유를 정치적 자유와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민주시민이라면 어떤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스스로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와 용기와 열정을 지녀야 한다. 그러한 의지·용기·열정이 넘쳐나는 사회에 거짓의 선동이 스며들 공간은 없다.

민주주의는 정치인들에게 바랄 것이 아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스스로 세워가는 것이다. 권력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이 국민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쓸모 있는 바보가 아닌 자유시민의 힘이다. 아무리 튼튼하게 쌓아 올린 성곽도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잡초의 생명력에 틈이 벌어지고 벽이 갈라져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 절대권력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들풀처럼 땅속 깊이 뿌리 내린 민초들의 자유혼, 주권자의 민주정신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주권자인가, 쓸모 있는 바보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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