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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러시아, 여전히 ‘거인’인 멀고먼 나라

[강성학 칼럼] 러시아, 여전히 ‘거인’인 멀고먼 나라

기사승인 2020. 01. 2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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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러시아는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지만 한국인에게는 머나먼 나라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러시아는 다른 유럽국들과 똑같이 지정학적 팽창주의를 지향한 강대국이었다. 기회만 엿보이면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북아(당시 극동)에서 국제적 힘의 진공상태를 채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팽창주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 걸친 영·러 간 경쟁과 영국의 두려움에 따른 견제로 러시아가 침략을 먼저 시작할 수는 없었다.

한국인에게 러시아인은 10피트 거인이었다. 1860년 한반도와 국경을 접한 시기부터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은 19세기 말까지는 한반도에서 국제적 힘의 균형 유지였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에게 크리미아 전쟁 후 유럽에서는 할 일이 없으니 “동쪽으로나 가보라”(Drang nach Osten)고 권유했다. 러시아는 실제로 시베리아 횡단철도까지 부설하면서 적극적으로 동쪽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20세기 여명에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대영제국을 동맹국으로 둔 일본에 육지와 바다에서 일방적으로 패해 큰 망신을 당했다. 이처럼 다른 강대국들과 경쟁할 수 없게 되자 러시아는 한반도로부터 완전히 철수했다. 러일전쟁 종전 이후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을 보면, 한반도가 러시아에 중요하지만 사활을 걸 정도는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당시 한국(조선)인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으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는데, 러시아의 지원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호까지 요청했다. 한국인은 임진왜란 이래로 일본인을 증오해왔기 때문에 일본과 러시아 중 러시아를 선택했다. 그 결과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전으로 끝난 후 한국(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주권을 상실 당하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20세기 소비에트 러시아도 볼셰비키혁명 후 ‘세계 공산주의혁명’이라는 새로운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이런 정책으로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다시 한반도에 등장해 한반도의 북측 절반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북한을 국제공산주의 확장을 위한 하나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그러다 김일성 지점장을 통한 한반도 공산화가 예상치 못한 미국의 참전으로 실패하자, 스탈린도 한반도에 대한 제1차적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세상에서 오직 미국만을 두려워했던 스탈린은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한미동맹이 체결되자 한반도 공산화의 꿈을 접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의 남북한 대결에서 러시아는 언제나 북한을 지지했고 그런 정책적 입장은 스탈린의 후계자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됐다.

소련제국의 붕괴 후 소비에트 러시아는 한동안 극심한 혼란이 지속됐는데, 옐친 러시아연방 대통령의 권력을 계승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선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는 보나파티스트(Bonapartist)가 되었다. 시저가 전쟁을 통치의 수(首)행위에 두었듯이, 권력기반 확립 후 푸틴도 2014년 전략적 영토의 확보를 위해 무력을 사용해 지정학적 요충지인 흑해의 크리미아 반도를 병합했다. 푸틴의 침략 행위는 국제사회로부터 도덕적 규탄만 받았을 뿐, 미국의 어떠한 군사적 대응도 유발하지 않았다. ‘기회주의적’ 군사행동이 결국 성공했다.

러시아의 전(全)역사는 서방문화를 거부한 채 이뤄진 서방과의 변증법적 대응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적 진실을, 러시아인의 메시아적 아이디어와 “역사의 종말”에 대한 버전을 지탱하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었다. 그 투쟁은 여러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러시아인의 그리스 정교, 피터 대제의 세속적 제국, 그리고 20세기엔 전(全)지구적 공산주의 혁명 등이 그것이다. ‘대서양주의’에 대응하는 ‘유라시아주의’도 그중 하나다. 그동안 지배적이던 ‘유럽문화중심주의’를 비판하며 20세기 말 등장한 유라시아주의는 유럽의 신(新)우익의 정신과 아주 가까웠다. 러시아의 신(新)유라시아주의는 새로운 개념들과의 결합으로 풍성해졌다. 신(新)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의 전통주의, 지정학,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정치적 개념,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실존주의 등과 결합했다. 그것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권력투쟁으로 간주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실존주의적 권력의지가 곧 삶의 의지라고 일관되게 강조한다.

20세기 말 신(新)유라시아주의는 주로 애국주의적이고 반(反)자유주의적 운동의 내적 일부였다. 그 후 유라시아주의자들은 국가적 볼셰비키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 하나의 독립적인 신(新)유라시아주의 운동이 형성되어 푸틴 치하 러시아에서 새로운 국가이데올로기로 재등장했다. 그것은 옛 원천에만 기초하지 않고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하여 서방세계의 반(反)근대적 원천에서 취한 새로운 요소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일정 수준의 사회적 인정을 획득했으며 우선 푸틴 주변의 정치적 서클들 안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됐다. 이런 러시아의 신(新)유라시아운동의 지적 지도자 알렉산더 두진(Alexander Dugin)은 오랫동안 푸틴의 보좌관이었다. 그를 비롯한 러시아의 지정학 관련 보좌관들은 미국의 지구적 헤게모니에 대한 평형축으로서 지구적 무대에서, 특히 유라시아대륙에서 러시아의 초강대국 위상의 복귀를 외친다.

1905년 이후 85년간의 긴 단절의 세월이 흐른 1990년, 한국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계정상화를 이뤘다. 이에 당시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한국정부와 한국인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러시아 러시”(Russia rush)에 빠져들었다. 러시아 러시가 있었지만, 한국인은 러시아에 대해 무지했다. 한·러 정상회담에서 유창한 통역사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소련제국의 붕괴와 그에 따른 냉전의 종식에 따라 러시아 내정이 혼란을 겪고, 21세기 중국이 급격하게 부상하자, “차이나 러시”(China rush)가 러시아 러시를 대치했다. 그래선지 한국인에게 러시아는 다시 머나먼 나라가 됐다.

그러나 러시아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2위 군사강국이다. 러시아가 아직 취약한 경제력 때문에 냉전시대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더해 인접국 중국의 급속한 부상에 가려 러시아의 부활노력도 한국인에게 가려져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여전히 거인이다. 러시아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유일 초강대국 미국뿐이다. 그래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거나 한미동맹이 크게 불안정해 보이면, 철저히 국제적 기회주의자 러시아가 갑자기 “러시아가 돌아왔다”고 천명하면서 우리 앞에 우뚝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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