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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괴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기자의 눈] “괴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

기사승인 2019. 05. 0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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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 브렌튼 태런트(28)가 남섬 최대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의 모스크 두 곳에서 총기를 난사, 50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뉴질랜드 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기록됐다. 총격범 태런트의 재판이 다음달 14일 시작되는 가운데, 뉴질랜드 언론이 내놓은 전례없는 ‘보도 프로토콜’이 눈에 띈다.

뉴질랜드 대표 언론사 5곳의 연합체인 ‘뉴질랜드언론자유위원회’는 내달 태런트의 재판을 앞두고 그의 주장이나 신념을 독자들에게 노출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공동 협약서에 서명했다고 가디언 등이 1일(현지시간) 전했다. 태런트의 백인 우월주의 ‘신념’이 언론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무분별하게 확산되는 것을 막겠다는 시도다. 협약서는 “피고 태런트가 자신의 재판을 백인 우월주의와 테러리스트로서의 견해 및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있어 우려스럽다. 이를 제한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가 취해질 필요가 있다”면서 피고인의 혐오 발언을 기사에 인용하지 않으며, 백인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이미지나 상징·나치식 경례와 같은 행동을 방송하거나 지면에 싣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협약서를 보면 지난달 17일 발생한 경남 진주시 아파트 방화·흉기 난동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피의자 안인득(42)은 경찰 조사중 “실직 이후 폐지 줍는 노인들에게 간식도 나눠줬다”며 자신의 선행을 강조하거나 “눈에 보이는대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약자를 타깃으로 한 계획범죄 의도를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가해자가 주장하는 인생 서사(敍事)를 그대로 옮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안인득은 이미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사 좀 해달라”고 외친 바 있다. 그의 말을 언론이 그대로 따라준 셈이 됐다.

이번 뉴질랜드 보도 협약에 참여한 언론사 중 한 곳인 라디오뉴질랜드의 폴 톰슨 편집국장은 “우리 언론은 더 이상 혐오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플랫폼이 되거나 혐오주의자가 벌이는 게임의 졸(卒)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괴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Don’t feed the troll.) 라디오뉴질랜드가 인용한 이 격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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