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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올림픽과 시장경제

[칼럼] 올림픽과 시장경제

기사승인 2018. 02. 1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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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평창올림픽 여자 500m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이상화 선수는 라이벌인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가 세운 올림픽 기록 36초 94에 0.39초 뒤져서 아깝게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하지 못하고 은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관중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후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아무튼 라이벌 간의 10분의 1초를 다투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쟁 자체가 관중을 운집시키는 힘이자 올림픽 정신과 눈부신 생명의 분출이다.


이런 올림픽 경기에서의 경쟁은 흔히 시장경제에서의 경쟁과 대비되어 이해되곤 한다. 물론 이 둘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만 일정 정도까지는 올림픽은 시장경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비유가 되기도 하고, 표준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의 문제를 비판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두세 명의 뛰어난 라이벌들이 있을 때 더 좋은 성과를 낸다는 올림픽의 사례는 교과서의 완전경쟁 모델이 정말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경제원론 교과서에서는 특정 시장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무수한 참가자들이 있는 완전경쟁 상태일 때, 참가자들이 시장가격에 영향을 끼칠 수 없기 때문에 경쟁이 완전하다고 할 수 있고 그 결과도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좀 더 동태적으로 보면, 어떤 이윤기회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첫 번째 참가자가 있게 마련이다. 정태적으로 보면 그 시장에서 '혼자'였지만 '이윤기회를 발견하는 경쟁'에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참가자들도 그를 모방해서 그 시장에 들어온다. 강력한 라이벌의 존재가 더 좋은 결과를 낸다는 점도 완전경쟁 모델과 이에 근거한 공정거래정책의 유효성을 의심케 한다.


경제학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비유는 시장경제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도 미리 정해둔 규칙과 심판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만약 운동경기에 미리 잘 정해진 규칙이 없고 심판이 멋대로 승자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 경기에 참가할 선수도 없을 것이고 혹시 참가했더라도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규칙이 미리 정해졌더라도 심판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규칙의 속성상 모든 발생할 구체적 경우를 예상해서 만들 수 없고 '추상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심판이 권위를 가지고 규칙을 '해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기의 규칙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시장경제가 잘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법의 지배' 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그 규칙을 따르는 한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행동영역을 보호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저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그 어떤 사람도 따를 필요가 없고 단지 법만을 따르면 될 때 우리는 자유롭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말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바로 이런 법의 지배가 실천되는 곳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잦은 노사쟁의나 통상임금 분쟁이 발생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올림픽에는 금, 은, 동메달로 승자들에게 영예를 주고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기계적인 결과의 평등을 원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장경제에서도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특정 상품을 구매하거나 구매하지 않음으로써, 즉 돈의 투표를 통해 자신들에게 봉사하는 상품에 '상'을 준다. 그 상을 얻으려고 기업들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동일한' 출발선의 비유는 '법의 지배'라는 개념만큼 자주 등장한다. 이 비유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결과의 평등은 아니지만 기회의 평등만큼은 보장해 줘야 한다는 주장과 동반할 때가 많은데 보통 무상교육 정책으로 구체화된다. 그렇지만 '기회의 평등'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는 개념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단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같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물려받은 재능까지 포함하는지 혹은 개인의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요소, 즉 운(運)을 말하는 것인지, 또 그와 관련된 결정에 사람들이 승복할 것인지 등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비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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