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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녀

[칼럼] 그녀

기사승인 2024. 06. 1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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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십 년 전 개봉한 영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Her)'가 재소환 됐다. 지난 달 오픈AI의 발표로 GPT-4o가 대중에게 선보였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영화 배경이 되는 2025년보다 일 년이 앞선 현재 눈앞에 펼쳐진 AI와의 대화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대화형 AI, OS1을 연상케 하는 말솜씨와 조크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명령자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폼이 영락없이 '그녀'였다.

존즈 감독의 주제는 분명한데, 데뷔작인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보면 그의 관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명배우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은 다소 황당해 보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간혹 대화 도중 다른 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상대를 조정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거나 혹은 그와 생각이 일치하고자 하는 보다 근원적인 기제가 발동해서일 수도 있겠다. 그것은 누군가를 통제하거나 아니면 그에게 통제받고자 하는 가학과 피학의 양가적 체험이다.

영화 '그녀' 역시 동일한 문제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편지를 대행해 주는 전문가이다. 연인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의 사연을 듣고, 직접 손 편지를 작성해 보내주는 일을 한다. 그의 글은 아름답다. 충분히 의뢰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이입하면서 편지를 작성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사랑하는 이와의 결별로 상처받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쓰는 대필 편지는 본인이 가진 내면의 결핍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극 중 누군가를 대신해 편지를 쓰는 직업의 은유는 곧 자기 내면에 충실한 나르시시스트의 자기연민으로써 거울 이미지를 의미한다.

앞서 소개한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티브가 등장한다. 기꺼이 돈을 내고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뒤로 말코비치 본인도 줄을 선다. 차례가 되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가 15분을 체험하는 말코비치의 눈에 비친 모든 등장인물은 말코비치 본인이다. 식당 안의 웨이트리스, 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 등 모든 이가 말코비치인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은 타자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통해 자아 이상을 구축하는 상징질서 틈에 발현된 거울 이미지로 채워진 나만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타자를 온전히 자기화하는, 현실에서는 용인되지 않는 이상적 자아의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그녀'의 테오도르와 '존 말코비치 되기'의 말코비치가 만나는 지점이다.

타자되기가 자기애의 정서로 회귀하는 이유는 지향점으로서 완전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타자와의 완전한 합일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흔한 연대조차 쉽지 않다. 일찍이 에리히 프롬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하여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어떤 상태를 향한 자유'를 구분한다. 프롬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대중은 전자와 같은 소극적 자유를 통해 익명성의 권력을 행사하게 됐으나, 현대사회에 와서는 그로부터 야기된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고도의 상상력이 필요한 타자로 지향되어야 할 자유를 포기하고, 도리어 전체주의와 같은 가학적 욕망의 주체에게 모든 것을 내맡긴 채 스스로 피학적 대상으로 전락하는 선택을 해왔다.

위와 같은 분석은 현재 우리 사회를 직시하게 한다. 초 디지털 사회로 진입한 우리는 AI가 제시하는 알고리즘에 의해 이미 수동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인들과 사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왕왕 '알고리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농담을 듣게 된다. 그런데 그게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 자유로부터 도피한 '나'라는 장벽에 갇힌 나를 간파한 AI는 나라는 자아에 투영된 거짓 욕망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끌게 자명하다. 이와 같은 경향은 더욱 일상을 지배하고 우리 사회를 미시파시즘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라도 AI 관련 연구와 교육은 과학, 기술 분야는 물론 인문사회학적으로 확장되어 다층적인 측면에서 치열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어쩌면 미래에 2024년은 AI, '그녀'가 등장한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21세기로 진입한 지도 사반세기가 되어가는 지금, 여전히 20세기 정치적 잔재와 대치하고 있는 형상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불가능한 연대로서 타자되기를 온전히 실천할 광장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역설 또한 가능해진 시대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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