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거룩한 신화적인 리더십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1.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717010010876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7. 17. 17:53

202407030100037560002159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지금까지 정치에 관해 쓴 책들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론 (The Prince)'의 저자인 마키아벨리(Machiavelli)는 바로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새로운 질서를 시작하는 우두머리가 되는 것보다도 더 다루기 어렵고, 더욱 성공이 의심스러우며, 관리하기에 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그가 비판한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처럼 자신의 정치적 목적지를 당위적으로 상정했을 뿐, 스스로 약속한 땅을 결코 밟지 못했다.

그의 계획은 그만큼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바꾸어 말한다면 그는 "영원히, 영광스러운 새로운 창업자와 수성가"가 되길 염원했다. 마키아벨리는 자기의 계획을 실천에 옮겨보지도 못했지만 그러나 세계사에서 18세기 말에 새로운 근대 민주 공화국을 신천지 미국 땅에 최초로 세웠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새로운 민주 공화국이 항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아주 탁월한 정치 지도자요 거룩한 영웅이 한 사람 있었다. 그가 바로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다.

마키아벨리는 무장한 예언자들(armed prophets)만이 성공했던 반면에 비무장 예언자들은 모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공한 영웅들로 모세(Moses), 키루스(Cyrus), 테세우스(Theseus) 그리고 로물러스(Romulus) 등을 내세웠다. 조지 워싱턴도 독립을 위한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아메리카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일종의 무장한 예언자였다. 그러나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서 1783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에 워싱턴은 대륙군의 총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로마 공화정의 킨키나투스(Cincinnatus)처럼 마운트 버논의 자기 농장으로 미련 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6년 후에 신생 독립국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워싱턴은 마키아벨리가 모두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비무장 예언자(unarmed prophet)였다. 게다가 조지 워싱턴은 8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스스로 다시 농부요 일개 시민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역사에 전례가 없는 중대한 차이로 인해 워싱턴을 단순히 "위대한(great)" 지도자를 넘어 신의 영역에 한 다리 걸치는 "거룩한(grand)" 지도자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요컨대, 창업 하나만도 매우 지난하고, 나아가서 수성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런데 이 어려운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성취하여 워싱턴은 세계 역사상 참으로 위대한 영웅이요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된 것이다.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국부로서 미국인들이 사우스 다코다(South Dakoda)주의 러시모어(Rushmore) 바위 산에 새겨진 4명의 큰 바위 얼굴의 대통령들 중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저명한 역사가들이 평가한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미국인들에 의해서 언제나 변함없이 인정되고 또 칭송을 받아왔다.

조지 워싱턴은 진실로 "조용한 사나이(a quiet man)"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주 카리스마적(charismatic) 지도자였다. 그가 살던 18세기엔 "카리스마(charisma)"란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 2세기 후에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에 의해 카리스마란 용어가 처음 사용되고 리더십의 연구가 보다 다양화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리더십 연구의 용어와 분류를 적용한다면 조지 워싱턴은 분명하고 명백하게 아주 두드러진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고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시대엔 탁월한 지도자는 전통적인 용어로 "영웅적 지도자(heroic leader)"로 묘사되었다. 간혹 영웅적 절대군주에게 대제(the Great)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으나 영국의 군주와 혁명전쟁을 수행하여 민주 공화국을 수립한 미국에선 "워싱턴 대제(Washington-the Great)"라고 호칭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단지 미국의 "대통령"으로, 그리고 동시에 "국부(the Founding Father)"로 불렸던 것이다.

새로운 길을 가는 천재에겐 롤 모델(role model)이 없다. 그러나 역사의 영웅들에겐 항상 롤 모델이 있었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에겐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iad)에 나오는 전설적인 아킬레스(Achilles)가 롤 모델이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에겐 알렉산더 대왕이 롤 모델이었다. 그렇다면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롤 모델은 누구였을까? 그에게는 로마의 킨키나투스(Cincinnatus)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한, 그리고 현대적 용어로, 카리스마적 지도자였지만 그는 스스로 그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함정을 항상 경계했다. 즉, 그는 정치지도자의 개인적 권력욕을 언제나 멀리했고 한동안 재선을 거부하기도 했었다. 참으로 특별히 완벽한 자기 통제력을 갖춘 역사상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찾아보기 힘든 그런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말하면 그는 자기 이전의 크롬웰(Cromwell)이나 자기 이후의 나폴레옹(Napoleon)이 아니었다. 그는 근대 정치사에서 조지 워싱턴이라는 새로운 군사지도자의 모델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정치지도자의 모델을 세웠다.

조지 워싱턴과 미국의 독립 혁명가들은 근대의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거대한 공화국을 미국 땅에 새롭게 성공적으로 수립했으며 새로운 생활양식과 질서를 창조했다. 그 위험스러운 기나긴 과정에서 조지 워싱턴은 필요불가결한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에 필요불가결한(indispensable) 사람은 없다"고 스스로 말했지만 그 자신은 미합중국의 창업은 물론이고 그것의 항구적 수성을 위한 수많은 리더십의 전례들을 남긴 "필요하고도 불가결한 인물"이었다. 미국 역사가들의 예외 없는 만장일치의 이러한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조지 워싱턴은 자기 조국인 미국의 국부로 그리고 또 미국의 킨키나투스라고 불리었다. 워싱턴은 위기와 최고 사령관으로서 피할 수 없는 압박에도 높은 원칙들을 고수함으로써, 그리고 은퇴 후에는 시민-농부로 돌아가고 그리고 마침내는 초대 대통령이 되어 그런 칭송을 얻었다. 조지 워싱턴은 일찍이 셰익스피어가 간파한 권력의 속성을 알고 그것의 위험성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살았던 겸허한 인물이었다.

"그러면 모든 것은 권력으로 잦아들고
권력은 의지가 되고 의지는 욕구가 되고
그리고 그 욕구는 우주의 늑대가 되리라.
그리하여 의지와 권력에 의해 배가되어
필연적으로 우주를 먹이로 하리.
그리고 끝내는 자기 자신마저도 집어
삼키리라."

그리고 워싱턴은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은퇴한 후에 자기가 죽은 뒤 모든 자기의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노예제도의 부당성을 숨김없이 인정했다. 이것은 노예를 소유한 대통령들 사이에서 참으로 독특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들어서 조지 워싱턴이 노예들을 소유한 농장주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를 폄하하는 현대의 역사가들이 있지만 그들은 워싱턴이 살던 18세기 말의 지배적 사회조건과 합중국 수립의 절대적 장애들을 아주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기원전 로마 공화정에 노예제도가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로마 공화정과 그것의 위대한 영웅들을 비하하는 것처럼 별로 설득력이 없다. 먼 과거의 역사적 업적을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관점에서 다소 미진했던 부분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인식적 오류이다.

워싱턴은 사적으로 노예제도에 점차 반대했다. 그러나 공적으로 그는 노예제도에 관해 침묵했다. 그는 자기가 죽거나 후에 부인이 죽으면 노예들을 풀어주라는 인정을 베풀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생애 동안 그는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공식적 천명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떤 비판자들이 주장하듯이 그가 어떤 종류의 인종주의자였거나 흑인 혐오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노예제 폐지를 찬성하는 공적 입장은 그가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간주하는 가치를 위험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는 나라의 질서, 안정, 그리고 생존에 입각한 미국의 통일이 최우선이었다. 신생 공화국의 생존에는 타협의 정신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노예제도가 언젠가 나라의 통일을 균열시킬 갈등을 실제로 안고 있다는 직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80여 년이 흐른 후에 결국 연방국가의 분열을 막고 통일을 유지하려는 남북 간 내전의 과정에서 노예해방을 선언하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조지 워싱턴은 역사상 식민지에서 해방된 최초의 신생국가인 미국의 국부로 추앙을 받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그는 모든 신생 민주공화국의 조부가 되는 셈이다.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는 민주 공화국의 운영에 필요한 기본 조직의 설계와 수립은 물론 운영의 전범들(examples)을 남김으로써 모든 신생 공화국 지도자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성공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전후 신생국가들의 대통령들이 조지 워싱턴의 조국을 향한 무한한 애국주의와 아낌없는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력에 겸허한 거룩한 인품을 배웠다면 그들의 정치도 한층 격상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지 워싱턴이야말로 기나긴 근대 역사에서 필적할 만한 인물이 거의 없는 참으로 보기 드문 귀중한 그리고 거룩한 인간적 참 스승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는 대통령직으로부터 은퇴 후 자기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대영제국의 왕 조지 3세와 권력의 화신 나폴레옹으로부터도 놀라운 칭송을 받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지 워싱턴 이후 역사상 수많은 독재자들이 그의 훌륭한 모범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