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주은식 칼럼]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물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1.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305010001995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3. 05. 18:55

2024022801002554800145561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그토록 오고 싶어 하던 한국 땅에 오지 못하고 눈을 감았을 때 영결식에 연락을 받고 온 이 박사의 친구 보스윅씨는 이 박사의 관 앞에 서서 얼굴에 덮혀 있던 베일을 걷어내고 이 박사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치며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내 소중한 친구여…"

보스윅은 하와이에서 장의사를 했는데 이 박사가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갈 때 여비가 부족해 임병직과 더불어 중국인 시체 운송 칸에 배편을 마련해 주어 임시정부 대통령을 하게 해 준 절친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를 읽기 전까진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했다고 들었고 그렇게 배워왔다. 정작 이 대통령은 3주 전후의 여행 삼아 하와이에 왔고 계속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가 귀국을 불허했다. 망명은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 자발적 의사로 타국에 몸을 의탁하는 것인데 우남은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몽매에도 그렸다.

◇하와이 여행을 망명으로 포장한 역사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에 돌아가셨는데 운명 전에 "일요건강"지의 간청으로 여사의 구술을 며느리 조혜자 여사가 받아서 기록한 글이 《대통령의 건강》이란 책으로 출간됐다. 2007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2017년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으로 재간되었다. 건강 이야기지만 프란체스카가 이 대통령을 만나게 된 사연부터 돌아가실 때까지의 사연을 회고한 내용이다. 17개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끝머리 이야기가 사랑으로 끝난다.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화두는 건강도 사랑에 바탕을 둔다는 뜻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한국의 독립운동, 대한민국 건국, 6·25전쟁 및 전후 재건과 경제부흥 등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의 대통령 부인이셨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교외에서 태어났는데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구분 못 한 사람들이 호주댁으로 부르기도 했고 6·25 당시 지원된 전투기가 호주댁의 고향에서 보낸 쌕쌕이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전통적인 한국 여성의 삶을 살다 가신 한국인이었다.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자유 한국 건설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해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자 했을 때 극구 사양하였다. 대한민국이 잘되고 국민이 행복하게 잘사는 것만이 부부를 명예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신의 모든 것을 한국을 위해 바치고 떠났다. 좌파들이 아무리 부정해도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바탕에는 우남이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토지개혁 그리고 국민 의무교육제가 있었다. 방위조약으로 경제 건설의 토대를, 토지개혁으로 공산화의 방파제를, 의무교육으로 기술교육의 토대를 닦았다.

이 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경무대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너무 울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고 경무대 내실근무자 방재옥씨는 증언하고 있다. 이화장으로 돌아왔을 때 기름이 없어서 총무처에 기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했다. 쌀을 살 돈이 없어서 온실의 화초를 팔아서 쌀을 사기도 했다고 하였다.

대통령이 돈이 없어서 월급을 못 줄 것을 알면서도 두 분을 너무 존경하여 이화장까지 따라 왔다고 한다. 이 박사가 돌아가시자 여사는 한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모국인 오스트리아에서 5년을 거주하다가 1970년 5월 16일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이 대통령의 장례를 끝낸 뒤 한국에 머물기 위한 아무런 대책이 없어 친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연금 문제가 법으로 정해지고 나서 당시 정부도 돌아와 사는 것을 권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시 3000달러를 가져와 틀니를 했다고 한다.

경무대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 상복을 입었다. 정치적인 것을 제외하면 우남 부부는 겸손하고 검소하였다. 두 사람은 항상 아랫사람들에게 "고맙습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소탈한 프란체스카는 아랫사람들에게 간섭을 하지 않았고 두 분의 내의와 양말은 직접 손으로 세탁했다고 하였다.

◇꿰맨 속옷, 노블리스 오블리제 상징

프란체스카는 그때 입고 온 속옷들을 15년 넘게 사용했는데 지금 이 박사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저기 헝겊으로 꿰맨 자국들의 누더기 옷은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고위공직자 부인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학습장이다. 양아들 이인수씨가 하와이에 갖고 가서 선물한 양산은 30년을 사용했고 1949년 장개석 총통이 한국 방문 시 마련한 냉장고를 35년간 사용했다.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선물했으나 전력 낭비가 심하다고 사용할 입장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옷도 한복을 즐겨 입었다.

이승만 박사의 전 생애에 걸쳐 그녀는 훌륭한 비서이자 동지였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한인동지회에서는 벽안(碧眼)의 이방인을 아내로 맞은 우남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고 공식 행사에는 혼자 참석토록 종용했으나 이 박사는 끝까지 같이 다녔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존중 못지않게 프란체스카의 이 박사에 대한 존경은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면면히 이어졌다.

고 이인수 박사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강인하였고 생활력이 강했으나 생전 딱 두 번 우는 것을 목격했다고 회고한다. 하와이 병원에서 이 박사의 주치의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했을 때 눈물을 보였고 또 한 번은 모든 귀국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려고 했을 때 정부가 귀국을 막았을 때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귀국이 허락되지 않았던 우남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6·25 때 가장 괴롭힘을 당한 미 장군들이 미육군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게 해주어 치료 및 연명했으나 끝내 살아서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가 구했던 나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미국을 곤혹스럽게 했던 이 박사 부부를 미국인과 하와이 교민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좌파들이 백년전쟁이라는 프로그램으로 흠집을 내지 못해 안달이 났지만 그들은 표리부동하게 행동하였기에 애국과 우국으로 점철된 우남과 프란체스카의 삶을 따라가려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영화 '건국전쟁'이 한국인을 울리고 프란체스카 여사의 꿰맨 속옷과 눈물이 한국인을 숙연하게 만든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하며 명복을 빈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