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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오페라 70주년]③한국 창작오페라의 도약을 이끌어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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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오페라 70주년]③한국 창작오페라의 도약을 이끌어낸 사람들

편집국 | 기사승인 2020. 03. 2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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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장일남·김동진·홍연택부터 '창작오페라 산실' 오페라단 만든 김자경까지
2012년 국립오페라단 창작오페라갈라 중 왕자호동
2012년 국립오페라단 창작오페라갈라 중 ‘왕자 호동’./제공=국립오페라단
1950년 오페라 ‘춘향전’이 공연된 직후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막 피어오르기 시작했던 한국오페라의 창작 열기는 다시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참화 앞에서 모든 예술분야가 그러했지만 특히 오페라의 경우 외국, 우리 창작오페라 할 것 없이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춘향전’ 이후 1952년 김대성이 작곡한 오페라 ‘콩지팟지’(콩쥐팥쥐)’가 발표되고 현제명도 1954년 ‘왕자 호동’을 다시 발표했으나 별다른 반향은 없었다. 거듭되는 사회적 혼란으로 당시 한국의 오페라는 10%대의 공연율을 보이며 일시적 침체기를 겪는다. 10년 가까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던 창작오페라는 1962년 국립오페라단 창단 작품으로 선정된 장일남 작곡의 ‘왕자 호동’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여러 민영 오페라단이 생기며 외국 오페라의 공연은 서서히 활기를 띄었으나 창작 작품은 여전히 부진했다. 그러던 차에 1962년 국립오페라단의 창단 공연은 당연히 우리 창작오페라가 돼야한다는 뜻에서 열린 공모에서 ‘왕자 호동’이 당선된 것이다. ‘왕자 호동’의 대중적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작품성 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가곡 ‘비목’의 작곡가이기도 한 장일남은 이후에도 오페라 ‘원효대사’ ‘춘향전’ ‘불타는 탑’ ‘견우직녀’ 등을 작곡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로 남았다.


1962년 국립오페라단 창단공연 왕자호동
1962년 국립오페라단 창단공연 ‘왕자 호동’./제공=국립오페라단
1960년대 후반 등장한 김자경오페라단은 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이었던 ‘라 트라비아타’에서 주역으로 활약한 소프라노 김자경이 창단한 민영 오페라단으로 이후 우리나라 오페라는 한동안 국립오페단과 김자경오페라단이 양분했다. 김자경오페라단은 1970년 제임스 웨이드 작곡의 오페라 ‘순교자’를 위촉, 초연했고 1971년에는 장일남에게 오페라 ‘원효대사’를 역시 위촉, 초연했다. 이어 1972년에는 박재훈 작곡의 오페라 ‘에스더’, 1976년에는 김동진 작곡의 ‘심청’ 등을 초연하며 우리 창작오페라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된다.


소프라노 김자경
소프라노 김자경.
오페라 ‘심청’은 작곡가 김동진이 ‘신창악’ 운동을 전개하면서 발표한 작품이다. 김동진은 우리 전통의 판소리를 오선지에 옮겨 서양 악보로 만들고 이를 다시 오페라에 적용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적 특징을 많이 담은 오페라를 창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 비롯된 신창악법은 일반적인 오페라 발성법과는 달라 성악가들이 노래하기에는 고충이 있었으나 한국적 특성을 살린 오페라를 제시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1975년 국립오페라단에 의해 초연된 홍연택 작곡의 ‘논개’는 모윤숙의 장편 서사시에 곡을 붙인 작품으로 광복 3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또한 1950년 현제명의 ‘춘향전’이 발표된 후 10번째 창작된 한국오페라라는 의미도 더해졌다. 이 오페라는 그동안 창가 형식이었던 우리 창작오페라의 창법에서 벗어나 바그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과 같은 후기 낭만파의 분위기가 느껴질 만큼 진일보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를 거치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창작오페라는 더욱 성숙해지며 발전해 나갔다. 이영조, 이건용 등 해외 유학경험이 있는 작곡가의 등장은 우리 오페라 창작의 수준을 높여주었고 다양한 형식적 실험도 나타났다. 이 시기 한국 창작오페라의 성장은 당시 우리나라의 국력과 경제력이 상승한 것과도 비례한다. 문화예술의 발전이 국력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 상명대 교수(yonu44@naver.com)


손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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