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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제이 조약(Jay Treaty)의 교훈

[강성학 칼럼]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제이 조약(Jay Treaty)의 교훈

기사승인 2023. 03. 2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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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모든 국가는 자국의 주관적 이익을 추구한다. 주관적 이익 추구는 종종 타국과 갈등에 휩싸인다. 그러면 국가간 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국가간 정의는 근본적으로 그들 사이에 동등한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약자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탁월한 통찰력은 지금으로부터 2천 5백 년 전에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발견한 이래 국제정치학의 제1의 원리가 되었다.


미국은 역사상 제국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최초의 신생국이다. 조지 워싱턴은 당시 아메리카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대영제국과 8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1789년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미합중국(간단히, 미국)이 건국에 성공했지만 당시 미국의 동부사람들은 국제통상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나 해양제국 영국에 의한 바다의 지배는 독립한 그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이 재임을 시작하던 1793년 새 공화국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영국정부는 영국해군에 지시하여 식량을 싣고 프랑스 항구로 가는 중립국의 선박들을 가로채고 그들의 모든 화물을 포획했다. 5개월 후에 영국해군은 프랑스의 서인도제도를 모두 봉쇄하는 것으로 간단히 확장되었다. 간단한 명령으로 영국해군은 250척의 배들을 정지시키고 장악하여 배의 상품들을 몰수해버렸다. 이런 영국의 강경한 조치들은 미국 내에서 정치적 폭풍을 일으켰다. 미국인들은 자국의 중립정책을 위협한다고 규탄하는 분노가 들끓었다. 영미 간에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 워싱턴은 심각한 정책적 난제에 직면했다.

미국인들은 영국과 전쟁을 피하고, 무역을 유지하며, 약탈당한 배들의 보상을 모색하고, 그리고 독립 후에도 아직 미국 땅에 남아있는 영국의 요새들의 철수 문제를 포함하여 현저한 분쟁들을 타결하기 위하여 영국에 특별외교 사절을 파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미 의회에서 영국에 대한 어떤 무역제제도 막길 원했다. 그는 친-영국 인물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해밀턴 자신이 그런 임무를 사양한 뒤에 이상적인 대체 인물로 당시 대법관인 존 제이(John Jay)를 임명하였다. 워싱턴에게 그는 영국과 평화를 확실히 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로 생각되었다. 대서양 횡단 통신의 오랜 지연으로 인해서 워싱턴은 제이가 런던에서 수행하고 있는 협상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제이에게 서두르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야 한다고 격려했다.

1795년 2월이 되자 제이가 조약을 매듭지었으며 멀지 않아 미국의 해안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6월 12일, 그 조약문서는 워싱턴 대통령의 책상 위에 있었다. 워싱턴은 영국에 크게 기운 조약의 내용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특히 그 조약은 영국이 공해상에서 미국의 배들을 나포하는 추악한 행위를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영국이 미국의 수입을 위해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영국의 수입에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고 있었다. 일단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은 마치 제이가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 선상에서 영국의 협상자들에게 엎드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조약은 여러 결함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마침내 5대호에 있는 영국 요새들의 철수에 동의했다. 그 조치는 영국의 서인도제도를 미국의 작은 배들에게 문호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조약은 나포된 미국의 상선들을 보상하기로 동의했다. 이런 양보들은 그 조약의 압도적인 성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영국과의 전쟁으로 나가는 치명적인 계기를 저지한 것이었다. 따라서 워싱턴은 이 결함을 가진 조약이 당시로선 가능한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그 조약내용의 폭발성을 잘 알고서 6월에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상원은 그 조약을 비공개로 논의하는 데 동의했지만 친-프랑스주의자인 토마스 제퍼슨이 이끄는 공화주의자들은 그 조약의 내용을 알고 나서 공포로 숨이 막혔다. 그들은 영국이 서인도제도에서 70톤 이하의 배로 미국의 무역을 제한한 악명 높은 제12조항을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결국 타협을 통해 그 조약은 6월 말에 20대 10이라는 투표결과에 따라 상원을 통과했다.

그러나 워싱턴이 조약에 서명하기 전에 그 조약의 요약문이 한 신문사에 의해 알려지자 대중은 너무나 아연실색하였다. 큰 소동이 일어났고 공화주의자들은 제이를 악마로 규정했으며 7월 4일 독립기념일에는 제이의 인형들이 많은 마을에서 불태워졌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뉴욕의 한 집회에서 조약을 옹호하려다가 항의자들에 의해 돌팔매를 당했다. 임시수도 필라델피아에서 대통령 관저는 매일같이 수많은 조약 반대자들에 의해서 포위되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미국이 영국과 새로운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조약은 새로운 지지자들을 확보함에 따라 격렬히 반대하던 공화주의자들도 서서히 후퇴하여 워싱턴의 편에 섰다. 그리하여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제이조약으로 영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조약으로 미국은 영국과의 통상을 유지하여 경제적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1965년 대한민국은 일본제국에서 해방되어 1948년 건국한지 17년 만에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하에 가까스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제이조약 못지않게 국내적으로 엄청난 반대와 극렬한 전국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본다면, 워싱턴의 제이조약이 미국의 안전과 번영에 기여했던 것처럼 한일조약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국가 간의 협상이란 언제나 상호간 "불만의 균형"에서 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일관계에서 우리의 일방적 "만족"을 위해 기원전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Trojan War)이후 3천 년 간 변함없이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그리스와 터키의 관계를 닮을 것인가? 아니면 조지 워싱턴의 제이조약에서 배울 것인가? 조지 워싱턴처럼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감정과 개인적 취향과 혐오를 억제하고 공동선을 확보할 실천적 과업에 전적으로 몰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비스마르크가 말했듯이 증오와 복수심은 정치에서 나쁜 상담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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