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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칼럼] 우리나라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

[이각범 칼럼] 우리나라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

기사승인 2023. 12. 17.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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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영화 '서울의 봄'이 현재 전국에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12·12 사태를 통하여 정권을 쥔 신군부의 가장 큰 잘못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꺾어버렸다는 데 있다. 이는 급속히 경제를 안정시키고, 88 올림픽을 유치한 공로로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과오다.

민주화로의 길을 막은 군부통치의 철벽 앞에서 절망한 젊은 운동권 세력은 작곡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천재 음악가처럼 긴장되면서도 숨 막히는 선택을 하였다. 바로 반인권적 폭압정권인 북한을 변혁의 동반자로 인정하면서 한국사회에서 '북한 터부'를 걷어낸 것이다. 이로써 한국정치에서 주체사상파는 또 하나의 주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비이성의 정치는 또 하나의 비합리적 통치에 길을 열어주었다. 짝퉁독재에 저항하기 위하여 진품독재와 손을 잡을 때부터 민주화의 목표 가치인 '자유'와 '민주'의 실현 대신 '평화'와 '통일'이 대안적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민주주의를 목적이 아닌 권력쟁취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40년 동안 한국정치의 주역으로서 활동하였다.

'선동'과 '매도'의 정치는 합리적 토론을 봉쇄하고 있다. 무오류성을 원칙으로 하는 집단적 위계질서 때문인가. 자기편의 잘못에 대하여는 인정하는 법이 없다. 나도 남과 똑같이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여야만 합리적 토론이 가능하다. 무오류성을 고집할 때 이미 독재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교수신문에서 '2023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된 견리망의(見利忘義)와 적반하장(賊反荷杖)이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국회와 사법부 등의 당리당략에 치우친 입법 활동과…국익과 정의를 외면한 편파적인 판결"을 보면 이로움을 좇아 의로움을 버린다는 표현 그대로이다.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적반하장은 조국사태 때부터 보아왔다. 친정권 검찰의 견제를 깨고, 권력의 외압에 맞서 조국일가의 입시비리를 당당하게 수사해 나가던 검찰에 대하여 '검찰개혁'이라는 명분을 건 전국적 시위가 일어났다. 별칭 '조선제일검'은 수사할 수 없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지금 7가지 사건의 10가지 범죄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대표를 둔 이 나라 원내 제1당은 검찰독재라는 프레임을 씌워 정부를 겁박하고 있다. 만약 현직 대통령에게 야당대표가 받고 있는 10가지 범죄혐의 중 단 한 가지라도 있었다면, 현재의 야당은 2016년에 그러하였듯이 광화문에서 청와대 앞까지 군중으로 가득 메운 촛불시위를 조직하였을 것이고, 국회는 탄핵소추를 결의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실에 입각한 논리의 힘보다는 힘의 논리가 더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지속하려면 민주적 통제(governance) 체제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에 등장한 민주당 정부는 민주주의의 최고점에서 '통제능력을 상실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다. 무질서와 무절제한 부패가 판을 치는 가운데 사상운동으로서의 교원노조운동, 조건 없는 통일을 외친 '민주통일 운동'이 이어졌다. 급기야 의사당을 점거한 4·19 세력, 경찰도 초등학생도 시위하는 데모만능주의가 국민이 경험한 민주주의였다.

5·16 쿠데타를 스스로 군사혁명이라 명명하며 등장한 군사정부에 대하여 4·19의 진원지인 대학생 여론까지도 찬반으로 팽팽하게 나뉘어졌다. 민주사회는 무정부사회가 아니다. 국민들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사회적 무질서가 무정부상태에 근접할수록 국민들은 국가적 통제(state governance)의 부활을 바라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당시 인류가 가진 최고의 민주헌법을 갖춘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지만, 과도하게 느슨한 통제와 무질서에 염증을 느낀 독일국민들이 오히려 '자유로부터의 도피(excape from freedom)'를 선택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민주당 정권의 부정부패를 극복할 수 있는 통제시스템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대한항공과 같이 정치적 청탁과 외압에 시달리던 공기업을 과감하게 민영화하였고, 그 결과 적자 공기업이 민간의 효자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3개 전력회사를 한국전력으로 통합하여 효율적으로 전력난 해소를 할 수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때부터 숙원사업이던 포항제철(POSCO)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박 대통령 자신이 정치적 부패의 방패막이가 되어 한때 세계 제일의 종합제철소를 한국이 보유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형성된 정경유착의 고리와 강압적 리베이트의 관행은 장기집권 과정에서 고착화되어 부정부패의 구조화를 야기하였다. 30년 전에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정직하고 깨끗한 정부'를 만들기 위하여 대대적인 부정부패 척결작업에 착수하였다. 5년간 지속된 사정작업과 부정부패 방지 제도의 정착으로 권력으로부터 비롯된 부패는 구조적으로 방지할 수 있었다. 다만 김영삼 정부 3년차에 실시된 전면적 지방자치제의 실시 이후 새롭게 시작한 지방권력의 부패와 의회권력의 부패라는 사각지대의 해소는 아직까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민주주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의 기반 위에서 성립한다. 지금 양대 진영으로 극명하게 나누어진 우리 사회는 합리적 토론공간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팬덤 정치가 반(反)지성주의를 만들고, 가치전도현상을 일으킨다. 현대인이 가장 많은 정보를 취득하는 사이버공간에서 생각의 자유공간은 줄어들고 있다. 철학의 빈곤 현상이다.

철학이 빈곤한 사회에서는 미래세대로 갈수록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확증편향이 심화되어 각 개인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생각의 공간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여론조작에 상당한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는 조직된 국내외세력이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의 빈곤을 극복하려면 가장 보편적 가치인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여야 한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인민독재이다. 인민은 추상적 집합체이므로 자유 없이 민주주의 하자는 것은 인민을 앞세운 소수 이념세력이 독재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세계가 다 같이 겪고 있는 위기의 터널을 벗어나 미래의 길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려면 우리에게는 보편적 가치인 자유의 고양이 필수적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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